오카자키의 안티 포스트 모던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를 아주 잘 설명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오카자키의 소녀들은 남자들과 섹스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남자들과 섹스한 걸로 떠드는 걸 좋아한다.” 굉장히 정확하지 않나요?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는 그런 친구들도 떠오르고 말이예요. 그런데 이 말은 단지 우스갯소리로서 적절한 걸 넘어, 오카자키의 세계관에 있어 그 핵심을 찌르는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선 이를 한 번 논해보도록 할게요. 일본 만화 비평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중 하나로, 오쓰카 에이지가 주창한 ‘아톰의 명제’란 게 있습니다. 간략히 요약해 보면 이런 거예요. ‘만신’ 테즈카 오사무가 창조한 저 유명한 캐릭터 철완 아톰에게는 강력한 로봇의 몸과 여린 인간의 마음이 공존합니다. 이 때문에 아톰은 성장하고 싶지만 성장할 수 없고 인간과 로봇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죠. 오쓰카는 이런 아톰의 캐릭터성이 전후 일본 (소년) 만화가 처한 조건에의 자기 반영이자 전후 만화의 핵심 과제로 작용했다고 주장한 거예요. 과연 어떤 조건 말일까요? 패전 후 토매해진 일본에서 (소년의) 성장을 ‘기호성(로봇의 몸)’과 ‘신체성(인간적인 마음)’이 병립하는 ‘성장 불가능’의 만화 캐릭터들로써 상상하고 재현해야 한다는, 허구적이고도 역사적인 조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화 일반과 전후 사회관을 유려하게 관통하는, 참으로 그럴듯하고 매혹적인 이론이 아닐 수 없죠. 그런 만큼 ‘아톰의 명제’는 일본 만화, 나아가 일본 서브컬쳐 비평에 있어 오랫동안 재생산되고 재해석되어 왔습니다.앞서 ‘소년’을 괄호 친 것처럼, ‘아톰의 명제’는 기본적으로 일본 소년 만화에 대한 이론입니다. 하지만 역시 괄호를 친 것처럼, 소녀 만화(순정만화)에서도 이와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하는 현상들이 나타났죠. 여러 ‘세계’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뇌하는 여자 주인공, 하염없이 지연되다 (초경을 비롯하여) 개벽처럼 묘사되는 성장의 순간, 실재감 없이 아름답고 종종 (젠더-)유동적인 신체를 지닌 캐릭터… 이 연장선에서 오카자키 쿄코의 만화들을 한 번 볼까요? 이전의 독해에 있어 오카자키는 주로 다음과 같이 논해졌습니다. ‘강한 기호성이 지나치게 평준화된’ 20세기 말 포스트 모던 사회를 예리하게 진단한 만화가다. 즉 개성적인 기호나 형식이 도처에 난무하기'만' 하면서 삶의 경험이랄 것은 극도로 가볍고 무뎌지고 아득해진 80~90년대의 보편적 현실감각을, 특유의 박약한 신체 묘사와 거친 드로잉 그리고 철저히 반 사회적인 캐릭터로써 통렬히 표현했다는 거죠. 저 역시 한때 이런 ‘표준적’ 독해에 몹시 공감한 바 있습니다.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치와와」의 한 대목, 토막 살해당한 치와와의 사건을 두고 TV에 나와 “물질과 정보가 대량소비되는 도시에 농락당한 젊은이가 극장 도시 도쿄에서 연기한 전형적 비극”이라 평한 평론가에 대해, “멋대로 떠들어대는 저 녀석들도 죽여버리고 싶어.”라 쏘아붙인 유미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이렇게만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20세기 말이 그런 포스트 모던의 시대였다는 당대 식자들의 지적에 점점 회의를 갖게 되거든요? 좀 더 정확히는, 포스트 모던이 20세기 말에 도래하거나 만개했다는 주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개성적인 기호나 형식이 그 자체로 난무하며 삶을 앞서는 일이 정말 그 시공에 결절한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특히 근대를 거친) 인간에게 그건 필연적인 현상이 아닐까요? 여기서는 오카자키를 구심점 삼아 고려해 봅시다.예컨대 우리는 그가 여러 작품에서 (1960년대의 장 뤽 고다르를 따라) 도시 풍경을 건조하고 무뚝뚝한 엄존으로 다루는 것을 보긴 했지만, 사실 이 풍경은 ‘80~90년대 일본‘을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지시한다기보단 도시라는 추상적 개념을 지시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달리 말해 오카자키의 만화에서 시대상이란 그렇게 구체적이고 엄격하지 않다는 얘기에요. 어쩌면 지난 ‘표준적’ 독해들은, 오카자키가 자연스레 암묵적으로 자기 당대(로서 현대)를 배경 삼아 만화를 쭉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로 그를 ‘당대를 다루는’ 작가로 쉽게 못 박아버렸던 건 아닐까요. 어떤 대상을 역사화하는 일은 그것을 제작 당시 사회의 일부로 바라보는 걸 넘어 거기에 얽힌 (예컨대 상당한 시차 속에서 대상들 사이에 깊은 유사성이 발견되는 식의) 혼탁한 시간성과 맥락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이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아톰의 명제’에 대해서도 오카자키를 통해 어느 정도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요. ‘기호성’과 ‘신체성’이 병립하는 만화 캐릭터의 성질이 패전에 따른 ‘성장 불가능’의 (무)의식과 결합하여 성장을 고민하는 전후 만화를 이룬 게 아니라, 애초에 신체나 삶이 그 자체로 (‘현대 일본’을 떠나) 늘 기호적이고 형식적인 대상이었으며, 외려 패전(과 결부된 현대화) 이후란 시공 속에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인간적’ 불안이 표출되고 과대표화된 장이 전후 만화였다고 말입니다.우리의 지각에 있어 신체 자체는 실재적이거나 자연스럽지 못하며, 언제나 감각이나 관념과의 불균형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성립되거나(내 맘대로 안 되는 신체 기관은 종종 독자적인 주체처럼 논해지죠), 적당한 환상성/허구성을 갖추어야만 실재(적으)로 감각됩니다(보통 섹스를 할 때 불을 끄는 것은 서로의 성적 환상을 지키려는 선택이죠). 이때 신체와 기호를 엄밀히 구분 짓는 게 과연 얼마나 가능할까요? ‘이미지’라는 개념이 우리네 삶에 필수적인 객체로서 위상을 얻은 근대 이후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포스트 모던적인 기류가 20세기 말에 형성되었다는 건 좀 부족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류가 우리의 삶과 역사를 이루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그 수준이 되어서야 발견한 거죠(물론 저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포스트 모던 비판을 따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쯤에서 『헬터 스켈터』에서 리리코가 실은 ‘엄마’의 “반복”이며 친여동생 역시 그 반복의 굴레에 끼일 거란 사실이 떠오릅니다. 이런 통렬한 통찰을, 오카자키 쿄코는 지극히 무람없는 만화로써 전개한 것입니다. 예컨대 『핑크』의 죄책감 없는 매춘이 당대적인 현상이 아니라 아주 ‘전통적인’ 현상이란 역사적 사실, 또 『리버스 엣지』에서 하루나가 처음 시체를 목도하는 “실감이 안 나는” 순간을 칸논자키와 루미의 (과도한 육감을 갈구하는) 섹스와 과격하게 교차시키는 연출, 그리고 「좋아해? 좋아해? 정말 좋아해?」에서 섹스와 어우러지는 노골적인 사랑의 언어를 무자비하게 해체하는 내레이션까지. 이런 차원에서 『헬터 스켈터』를 봅시다. 극단적인 성형수술을 통해 순전히 만들어진 리리코의 신체는 아주 위태롭게 균형을 잡습니다. 신체 자체의 불안정성 속에서, 제멋대로인 광기 속에서, ‘소비되는 것만이 존재한다’라는 모던한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세간의 시선 속에서, 리리코의 행동과 내면을 찢어버리는 외설적인 내레이션 속에서, (오카자키의 궤적에서 이례적인) 초현실적인 장면과 지저분한 펜선 속에서, 그리고 그 균형 잡기의 시도로 인해 더더욱 커지는 파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죠.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며 『헬터 스켈터』는 지금까지 논한 오카자키의 문제의식이 과격할 정도로 전면화된 작품이 됩니다. 신체도 삶도 말 그대로 여러 기호들의 (원형도 근본도 없는) 조합으로 다뤄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조합이라는 걸 부정하려는 격렬한 ‘인간적’ 반작용이 더 무시무시한 실패와 파괴를 향하고 나아가 (오카자키 자신의 스타일을 벗어날 만큼) 파편적인 기호의 범람을 야기하기도 함을 적나라하게 제시하니 말이예요. 천박한 소녀들에게 상냥하고 잔인한(그리고 이런 방식으로만 저들을 사랑하는) 오카자키에게 있어서는, 이 위태로운 것들이 외려 진정한 삶의 양태일 것입니다.그리고 그렇기에, 『헬터 스켈터』가 지금까지 오카자키의 마지막 만화라는 것은 묘하게도 아주 적절하고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만화가 얼마나 불온해질 수 있는지를 과시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적절하고, 그의 만화가 더 불온해질 수 있는 여지를 과시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어색한 거죠. 그래서 저는 『헬터 스켈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구, “TO BE CONTINUED”를 아직까지도 믿으며 기다리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