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불편한 삶 1974년생으로 이제 50대에 접어든 에이드리언 토미네는,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진 않은 이름입니다. 『완벽하지 않아』(2007/2011)나 『뉴욕 드로잉』(2012/2017)이 한국에 나름 일찍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요. 하지만 미국 북동부-즉 뉴욕의 예술계에서 그는 아주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입니다. (성에서부터 알 수 있듯) 4세대 일본계 미국인인 토미네는 고학력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여러 분야에서 교양을 쌓을 수 있었고, 그런 만큼 법적 성인이 되기 전인 91년부터 자체출판이나 타블로이드 잡지를 통해 단편만화를 발표했어요. 하지만 이 당시는 미국에서’도’ 만화에 대한 폄하가 극심한 시기였고, 그래서 토미네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또래 급우들로부터 괴롭힘과 멸시를 종종 받았다고 합니다. (여담이지만 토미네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만화가로 ‘사랑과 로켓’ 시리즈의 하이메 에르난데스와 『고스트 월드』의 대니얼 클로스를 꼽았습니다. 게다가 훗날 비평가들로부터 짝퉁 대니얼 클로스라는 좀 그럴 듯한 비난을 받기도 했고요) 그는 98년에 대안만화 출판사 드런 앤 쿼털리(Drawn & Quarterly)를 끼고 이전에 산발적으로 발표했던 저 만화들을 묶어 『32개의 이야기(32 Stories: The Complete Optic Nerve Mini-Comics)』와 『몽유병과 다른 이야기들(Sleepwalk and Other Stories)』이란 두 권의 작품집을 내면서 뉴욕 힙스터들 사이에 '슈퍼루키'로 알려지게 되었고, 다음 해인 99년부터는 《뉴요커》의 표지를 제작하고 만화도 연재하면서 자기 기반을 갖춰 나갔습니다. (역시 여담이지만, 이 즈음부터 그는 일스나 요 라 텡고같은 인디 록 밴드들의 앨범 커버를 디자인하기도 했어요) 앞서 소개한 『완벽하지 않아』같이 디아스포라 예술가로서 자신의 인종적·계층적·젠더적 경험에 기반을 둔 '일상적' 작품들을 발표하며 언론과 일반 독자들에게 주목을 받던 토미네는, 2015년에 오늘 저희가 다룰 『킬링 앤 다잉』을 발표하면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죠.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높은 성공을 거두며 그의 대표작이 된 책이지만, 사실 『킬링 앤 다잉』은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궤적에 있어 상당히 이례적인 작품입니다. 이 이후 2020년에 발표한 『장거리 만화가의 고독(The Loneliness of the Long-Distance Cartoonist)』은 장편 회고담 만화라 컨셉과 서사 측면에서만 보면 『킬링 앤 다잉』 이전 작품들과 더 연결점이 많아요. 반면 여기에는 전통적인 신문 코믹 스트립의 양식을 고스란히 패러디한 작품도 있고, (미국 독립만화의 주류인) 도회적이고 분란 많은 삶을 건조하게 그린 작품도 있으며, 최근의 인스타스토리에 가까워 보이는 엽서풍의 서간체 작품도 있습니다.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 서사는 좀 더 '미국식 단편소설'에 가까워졌으며, 6개의 에피소드는 (퍽 단조로운 그림을 제한다면) 모두 다른 형식과 구조로 이루어져 있죠. 그럼 과연 토미네는 어떤 생각으로 이 만화들을 한데 묶은 걸까요? 추상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갈팡거리면서도 격렬한 각각의 반응들이 여기서 기민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응이라고 해서 해결책이나 대응을 얘기하는 건 아니고요, 삶의 부자유가 두드러지는 순간에 즉각 나타나는 무조건 반사의 행동에 가깝죠. 「원예조소」 25쪽에서 신음과 함께 "그냥 무너져가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해럴드나, 「칩임자들」 116~118쪽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어린 침입자와 격한 몸싸움을 벌이는 선(先)침입자 주인공처럼 말이죠. 게다가 토미네는 이런 반응을 철저히 건조하게 연출합니다. 「고! 아울스」에서 여러 사건들이 ‘서사적으로’ 긴밀히 엮이는 대신 성기고 단편적으로 툭툭 이어지는 것처럼, 맥락 설명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생략을 쭉 밀고 나가는 겁니다. 『킬링 앤 다잉』 전반의 이러한 생략은 (「앰버 스위트」를 제외한) 작품들의 강박적인 대칭적 칸 배열 속에서 잔혹함의 효과를 얻습니다. 만화의 형식으로 인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투명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는 데서 오는 잔혹함 말입니다.다만 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잔혹함이 문학비평의 주요 수사 중 하나인 '실패'와 상통한다는 건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실패는 사실 오랫동안 픽션이, 그중에서도 19세기 이래 미국 문학이 오랫동안 강하게 천착해온 주제죠. 그렇다면 저 설명 자체만으로는 『킬링 앤 다잉』의 독특성을 논하기에 불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단지 이런 실패를 다룬다는 것 자체로 자신이 독특한 작품을 만들었다 자만하는 작가들이 참 많죠.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를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표제작 「킬링 앤 다잉」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죠.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하는 ‘찐따’ 딸 제시와 그 부모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 작품은 한 페이지당 가로 4칸, 세로 5칸으로 해서 균질한 모양의 20칸을 기본 서식(template) 삼아 진행됩니다. 이야기로나 시각적으로나 참 답답하죠. 여기서 주인공인 아빠 캐릭터는 자꾸 다른 캐릭터들과 마찰을 일으키는데, 그건 그가 신경질적인 남자라서만은 아닙니다. 이 마찰의 순간은 항상 그가 타인과 정면으로 마주볼 때 발생해요. 단지 같은 눈높이에 있을 때가 아니라, 눈을 맞추며 대화하고 그것이 시각적으로 직접 제시될 때 말입니다.예컨대 87쪽과 89쪽에서 아빠와 제시가 서로 성을 내는 장면을 봅시다. 서로가 있을 곳으로 시선을 던지는 두 사람 각자의 칸이 교차되면서 마찰이 일어나죠. 반면 제시가 처음으로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습하는 90쪽에서는 분명 (‘현실적’ 상황이라면) 제시와 부모님이 마주보고 있을 텐데, 제시가 계속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기 때문인지 앞의 것과 같은 마찰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이 작품 전반에서 반복되고 변주돼요. 이 연장선에서 제시가 스탠드업 코미디 실전을 치르는 두 장면을 비교해봅시다. 첫번째 장면에선 말도 안 더듬고 성공적으로 무대를 치르는데, 여기서 관중의 전반적인 반응은 익명화/추상화되어 괄호 속에 문자화된 것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제시와 관중 사이엔 마찰이 안 일어난다는, 아니 마찰을 만들지 않겠다는 토미네의 의지를 느낄 수 있죠. 반면 두번째 장면은 어떤가요. 제시가 말실수로 입을 떼자마자 관중(정확히는 다른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칸이 끼어들어 제시와 마주하며 마찰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후 번번이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는 제시와 관중 개개인의 칸이 교차되며 무대는 엉망이 되죠. 이 장면이 참혹한 건 단지 제시가 자기 무대를 망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시선의 교차를 마찰의 상황으로 만드는 버릇이 어느덧 아빠에게서 제시에게도 옮아갔기 때문에, 아니 애초에 그런 버릇이 핏줄 답게 아빠의 성질이자 제시의 성질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참혹한 거죠. (두 사람의 시선이 직접 교차하는 장면은 엄마가 죽은 후엔 일절 나오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에야 제대로 나옵니다)이렇듯 토미네의 주의 깊은 시선 연출은 「킬링 앤 다잉」에서 작품을 가로지르는 규칙성을 환기하거나 그것이 현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아가 『킬링 앤 다잉』의 모든 에피소드가 이렇게,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죠. 요컨대 형식으로써 서사를 선험적으로 결정지어버리는 엄정한 규칙성이 각 에피소드에서 캐릭터를 실패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 아울스」에서 마지막에 남자가 체포되는 건 그의 숨겨진 범죄 때문이 아니라 앞에서 제시된 적 없는 그의 전사(前事)가 튀어나왔기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반복하건대 “만화의 형식으로 인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삶'을 내가 주도적으로, 투명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는 데서 오는 잔혹함”이 『킬링 앤 다잉』이란 책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잔혹함은 핍박의 동의어가 아니에요. 적어도 『킬링 앤 다잉』에서는 말입니다. 앞서 말한 맥락 설명과 감정 표현에 대한 생략은 엄정한 규칙성 속에서 이중의 효과를 발산합니다. 독자의 상상적인 개입('이 인간들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과 기피('이 인간들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를 동시에 촉진하는 절묘한 이중의 효과 말이에요. 당연히 옳지 못하고 막무가내인 캐릭터들에게서 발언권을 빼앗고, 이들의 갈팡거리면서도 필사적인 반응들은 남겨 놓으면서, 토미네는 저 상반되는 정서를 함께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적절한 만화적 거리를 구현해냅니다.그러면서 『킬링 앤 다잉』은 아주 근본적인 의미에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만화가 됩니다. 우리가 마냥 이해할 수도 마냥 거부할 수도 없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불편한 감각을 압축적으로, 다만 우리가 긍정과 부정 어느 쪽에도 경도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표현하는 신묘한 균형의 만화 말이죠. 이는 엄청난 성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나마 불평할 거리가 있다면, 모든 세부가 지나치게 계획적이라 그 계획이 종종 눈에 띈다는 것 정도일 겁니다. 어떤 행동이든 '꼼수'가 투명하게 비치면 감정이 식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이조차도 '더불어 사는 삶'의 불편한 감각을 형성하는 데 퍽 일조한다는 점에서, 토미네는 참 영악한 만화가라 할 만합니다. 동료 만화가인 크리스 웨어는 『킬링 앤 다잉』을 두고 다음과 같이 극찬했죠. “진지한 만화가라면 ‘그 책’을 만들게 되기를 내밀히 소망하기 마련이다. (...) 토미네의 『킬링 앤 다잉』은 마침내 ‘그 책’에 도달했다.” 이는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께서 ‘코믹스’로서 만화 연출에 관심이 있다면 절대 이 책을 지나치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