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그리고… ‘그리고…’ Writer 최민호(쪽프레스 편집부)『다트』는 앨리스 오스월드의 두 번째 시집이다. 그는 2년간 다트 강 주변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집한 기록과 언어를 바탕으로 책 한 권 분량에 달하는 긴 시를 썼다. 밀렵꾼, 나룻배꾼, 하수 작업자, 산림 관리자, 카누 타는 사람, 도보 여행자 등 다트 강에 관련 지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는 강의 존재적, 신화적 목소리가 되어 강의 근원에서부터 바다에 다다르기까지 흐르고 범람하고 깨지고 다른 지류를 만나 합쳐지며 강의 음성을 만들어낸다. 『다트』에서 등장하는 다트 강은 영국 데번주에 위치한 강이다. 강은 다트무어에 발원지를 두고 그 끝은 바다에 가 닿는다. 길이는 75km에 달한다. 동다트와 서다트로 이루어진 두 개의 지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두 지류는 다트미트에서 만난다. 다트의 어원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강의 하류가 고대 참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어 참나무를 의미하는 Dar-에서 유래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시는,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살아서 황무지를 헤매는 이가 누구요?1 목소리. 아직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다. 말을 건넨다. 정확히는 물음을 건네고 있다. 목소리의 정체는 곧 밝혀진다. 다트 강이다. 어둠 속에 낮게 엎드린 강 다트가 부른다, 누구요?2 대답이 잇따른다. 나는 50년간 산사람으로 산 늙은이요, 내 심장이 멎을 때까지, 마침내 황무지로 왔소, 모든 길을 걸어, 두 오솔길, 바위, 여기 길고 구불구불한 다트까지3 이렇듯 『다트』는 다트 강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다트 강은 자신에게 속한 이의 정체를 묻는다. 물음에 대한 대답이 잇따른다. 책의 본문을 보자. 편의상 둘로 구분할 수 있을 이 목소리는 같은 서체, 같은 크기로 인쇄되어 있다. 구분은 없다. 본문은 책의 오른쪽 면에서 흐르고, 다른 목소리가 등장할 때 목소리의 정체는 왼쪽 면에 표기되어 있다. 정체는 어떠한 행위나 직업, 설화 등이다. 정체성을 밝힐 만한 분명한 소속이나 이름은 없다. 표기는 단 한 번 이루어진다. 여타 희곡이나 소설에서 갖가지 목소리가 함께 등장할 때를 생각해본다면 『다트』의 경우가 특수함을 알 수 있다. 소설은 목소리의 앞뒤에 큰따옴표를 씌워 말하는 이를 표시한다. 희곡일 때는 대사의 앞에 인물의 이름을 표기하여 목소리가 어떤 인물에 속함을 표시하여 목소리를 구분한다. 이 경우에 한 화자가 다른 화자와 구분되어 있고 함께 있음을, 구분된 정체성이나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가 소설이나 극의 주요한 흐름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구분은 본문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다트』에서 보이는 소극적인 구분 방법은 소설이나 희곡의 경우와 역할이 다르다고 고려할 수 있다. 표기는 본문과 외따로 이루어지고 작고 소극적이다. 한 번 표기된다. 또 목소리의 주인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은 쉼 없이 바뀌며 뒤섞인다. 밀렵꾼, 나룻배꾼, 하수작업자, 산림 관리자, 카누 타는 사람, 도보 여행자…,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따라서 이 표기는 목소리의 정체성을 밝히고 각 목소리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오스월드는 미리 단서를 덧붙여 두었다. “표시자들은 실제 사람이나 고정된 허구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목소리들은 전부 강의 웅얼거림으로 읽혀야 옳다.” 또는 제사로 사용한 이반 일리치의 글, “물은 언제나 자아와 또다른 자아를 데리고 온다.” 『다트』를 구성하는 목소리는 다변(多辯)하고 다변(多變)한다. 강을 에워싼 행위나 설화, 여러 생명체의 경험은 강의 목소리가 되어 『다트』를 구성한다. 이는 마찬가지로 『다트』가 이 글의 서두에 쓰인 『다트』에 대한 설명문이나 다트 강에 대한 설명문과 다르다는 점을 지시한다. 『다트』의 장르가 시이고, 다트 강에 대한 문단이나 『다트』에 대한 문단이 설명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그렇다. 이 차이는 구술성과 문자성의 차이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 매체 이론가 월터 J.옹은 저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구술성과 문자성을 비교한다. 문자성 안에서 우리가 ‘나무’를 지칭할 때 이 말은 구체적인 나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감각적인 현실에서 도출되고 떨어져 나온 하나의 추상이다. 이처럼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는 문자문화에 속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다트』를 설명할 때 “수집한 기록과 언어를 바탕으로…”, “강의 존재적, 신화적 목소리가 되어 흐르고…” 라고 쓸 때도, 또 다트 강에 관해서 설명할 때 “영국 데번주에 위치한”, "두 개의 지류로 이루어져 있고”, “참나무를 의미하는 Dar-에서 유래한”다, 라고 쓸 때 사용한 개념과 단어 또한 하나의 추상이다. 이에 반해 구술문화는 추상적이기보다는 상황의존적이다. 이 상황의존성은 생활세계에 아주 밀착해 있다. 월터는 그 예를 루리아(A. R. Luria)의 『인식의 발달: 그 문화적·사회적 기초(Cognitive Development: Its Culture and Social Foundation)』(1976)의 연구를 통해 밝힌다. 루리아의 연구는 읽고 쓸 수 있는(문자문화에 속하는) 사람과 읽고 쓸 수 없는(구술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어떠한 사물의 정의에 관한 질문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과 달리 구술문화에 속하는 피험자들은 사물의 정의에 관한 질문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무란 무엇인가, 나에게 설명해 보십시오.”라는 질문에 “어째서 그래야 하죠? 나무가 무엇인가는 누구나 알아요. 누구도 나로부터 그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돼요.”4 라고 대답하거나나 “나무를 두 단어로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두 단어로요? 흠, 사과나무, 은행나무, 포플러나무같이 말인가요?”5 하는 식으로 대답한다. 더 나아가 구술문화에 속하는 피험자들은 인터뷰에서 말로써 자기를 분석하는 데 곤란을 느꼈다고 한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의 성격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단점은?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피험자는 “나는 우츠그루간에서 여기에 왔죠. 무척 가난했지만 지금은 이미 결혼해서 자식도 있어요.”6 라고 답변한다. 또 “그러면 당신의 단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금년에 보리를 1푸드 경작했지요. 우리는 조금씩이지만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고 있어요.”7 라는 답을 한다. 자기분석을 할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을 단일한 개인으로, 자아로 분리할 필요가 있으며, 자신을 둘러싼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앞선 인터뷰를 통해 바라볼 때, 구술문화에 속하는 피험자들은 경험적이고 상황의존적인 사고에 익숙한 나머지 자신을 자신의 상황과 관련지어 바라보고 있다. 그들 자신에 대한 질문에 피험자는 자기평가를 타인으로부터 예상되는 반응으로 바꾸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 스스로 자기 마음이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라면 나에 관해 당신에게 여러 가지로 말해줄 테니까요.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8 피험자의 답변과 『다트』의 시행은 유사하게 느껴진다. “나는 금년에 보리를 1푸드 경작했지요. 우리는 조금씩이지만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고 있어요”와 “나는 50년간 산사람으로 산 늙은이요……. 마침내 황무지로 왔소, 모든 길을 걸어, 두 오솔길, 바위, 여기 길고 구불구불한 다트까지” 같은 시행을 맞대어 놓을 때 그 유사함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가 누구인지 묻자 답변은 그의 상황에 의존해서 내려진다. 나아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앞서 인용한 것과 같은 장에서 구술문화의 특징을 더 발견할 수 있다. 첨가적, 집합적, 장황하거나 다변적, 전통적, 생활세계 밀착적, 논쟁적 어조, 공감적·참여적, 항상성, 상황의존적. 우리는 여기에서 『다트』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몇 가지 단어를 발견한다. 첨가적, 집합적, 다변적, 생활세계 밀착적, 상황의존적. 『다트』의 제사로 사용된 이반 일리치의 글로 돌아가 보자. 그의 말에서 ‘자아’라는 단어를 추출해 보자. 자아. 자아는 스스로 자(自)에 나 아(我)로 이루어져 있다. ‘스스로’와 ‘나’는 동일한 대상을 지칭한다. ‘나’다. ‘나’는 스스로에게 지칭된다. 이 지칭은 구분을 전제로 한다. ‘나’와 너. 구분은 곧 분리다. 분리는 곧 앎을 만든다. ‘나’는 이렇다 혹은 저렇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한다. 구분한다. 이것과 저것.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 그러나 이반의 글에서 ‘자아’의 역할이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게 아닌, 다른 자아를 불러오기 위함인 것처럼 『다트』에서 이루어지는 것 또한 이것과 이것이 아닌 것, 이것과 저것 등을 통한 분리가 아니다. 이것은 저것을 불러온다. 이것은 저것과 같다. 저것은 이것이다.‘이’와 ‘저’가 행해지지 않는다. 자아는 또 다른 자아를 불러온다. 첨가적이고 집합적이다. “철벅철벅 물을 가”르더라도 “뒤에서 물이 다시 만나서 닫”힌다. 입말로, 강의 목소리로. 월터는 “구술적 사고는 매우 세련된 것일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반성적일 수 있다”고 말하며, 구술문화에 속하는 나바호족 화자들을 말한다. “나바호족 화자들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복잡한 사건들을 이해시키는 여러 의미를 포함한 이야기에 관해서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다.”9 그의 말을 따르자면 『다트』는 여러 사람의 구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트 강을 에워싼 생활에 대한 정교하고 총체적인 접근이다. 한편으로 『다트』는 책이다. 쓰인 것이고 인쇄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문자문화에 속한다. 월터의 구분을 따르면 구술성과 문자성은 서로에게 이질적이다. 쓰인 문자는 고정된다는 점에서 발화와 동시에 사라지는 목소리와 다르다. 마찬가지로 작가 또한 쓰는 존재임으로 문자문화에 속한다. 하지만 『다트』에서는 문자문화에 해당하는 속성인 개념적이라거나 추상적인 속성이 보이지 않는다. 『다트』는 사라지기 쉬운 목소리를 채집해 구성되었다. 또 그 구성이 단일하고, 구분되는 자아를 형성하지 않는다. 『다트』에서 여러 생명체의 목소리는 물처럼 흘러내리고, 부서지고, 합쳐지고, 다른 목소리와 만나 맴돌고, 급류에 휘말리는 식으로 이어지며 다트 강의 첨가적인 총체적인, 그러나 일시적인 형상을 만든다. 그럼으로써 『다트』는 인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단일하고 분리적이기보다 다층적이고 다변적이다. 이반의 말에서처럼 물이 ‘자아’로 하여금 다른 ‘자아’를 불러오게 한다면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문자문화, 인쇄문화에 속하는 『다트』 또한 강으로 하여금 다른 ‘자아’를, 생명체들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구술성과 문자성의 사이에 자리한다. 그렇다면 『다트』와 나란히 놓인 자리에선 이러한 일도 가능할 것이다. ‘『다트』는 앨리스 오스월드의 두 번째 시집이다…… 다트 강에 관련하는 수많은 목소리는 강의 존재적, 신화적 목소리가 되어 흐르고 깨지고 범람하거나 다른 지류를 만나 합쳐지며 다트 강의 음성을 만들어낸다.’나 ‘『다트』에서 제시되는 다트 강은 영국 데번주에 위치한 강이다…… 강의 하류가 고대 참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어 참나무를 의미하는 Dar-에서 유래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와 같이 문자문화에 속하는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설명문 또한 『다트』의 지류 중 하나로 바라보는 일이. 『다트』에서 흘러나온 이 두 설명은 다시금 『다트』의 지류와 만나 다트 강의 흐름에 합쳐진다. 1 앨리스 오스월드, 『다트』, 홍한별 옮김, 고트, 13p.2 위와 같은 책.3 위와 같은 책, 15p.4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임명진 옮김, 문예출판사 103p.5 위와 같은 책.6 위와 같은 책, 104p.7 위와 같은 책.8 위와 같은 책, 105p.9 위와 같은 책, 10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