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개념원리』구매하기 2025년 goat에서 소개하는 여름 첫 책은 대중음악 비평가 전대한의 『비개념원리』입니다. 2020년부터 틈틈 쓰고 기고했던 원고들을 한데 묶고, 퇴고하고, 새로운 원고를 더해 소개하는 비평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수학교재의 따온 듯한 제목에서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외우는 것이 가능할 만큼 명징한 개념과 원리들을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는 수학의 반대급부에 음악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실제로 음악에는 개념화하기 까다로운 주제들이 얼마든지 있고, 이 난처함은 보통의 음악청취자뿐 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비평이라기보다는 취향의 선언일 따름인 수많은 음악 글들을, 누군가가 제대로 비판하거나 다음 견해를 개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가 쉽지 않습니다. 취향의 부정이 될까 두려워서, 한번 파고들기 시작하면 닫기 어려운 판도라의 상자일까 겁이 나서, 우리는 곧잘 음악을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지는 않은가요?적어도 이 책의 글쓴이 전대한은 실은 '비개념'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것들이, 명료화하고자 하는 눈과 머리와 손을 거치면 '개념'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020년부터 시도하고 실천해보았고요. 그 결과 그렇게 해낼 수 있는 원리가 있고, 그 원리는 사실상 태도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그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아마도 당신 역시 이전처럼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거나 진지한 논의는 뒷전으로 미뤄두는 식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더는 편하지도 즐겁지도 않아질지도요. 이러한 원리를 박지호라는 그래픽디자이너가 시각화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형태에 만화가 실키가 옷을 입혔습니다. 더는 비개념으로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음악들을, 청자에서 독자, 독자에서 청자를 오가며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추천하는 말내게는 이분법적인 편견이 있다. 도전하는 글은 명료하지 않고, 명료한 글은 도전하지 않는다. 도전하지 않으면 자칫 시시하고, 명료하지 않으면 자칫 피로하다. 그런데 전대한의 글은 이 편견을 넘어선다. 그는 명료함을 가장 큰 도구로 삼고 음악에 대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한다. 음악 글쓰기는 보통 작품이나 작가의 크고 작은 역사를 읊거나, 음악현상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것 같다. 이런 음악 글을 통해서 독자는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를 듣거나 자신이 놓쳤던 감각을 보상받는다. 이 두 유형 모두 독자를 앞서간다. 하지만 전대한의 음악 글쓰기는 이 두 유형과 다르다. 그가 음악을 생각할 때 가장 일차적인 재료이자 도구로 삼는 것은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말’ 혹은 언어다. 그는 음악을 둘러싼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지 합의하고 제안하는 데 집중한다. 그래야 펀치라인, 마이크드롭 또는 프로파간다에 그치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는 독자를 앞서가기보다 독자(즉 언어 사용자 일반)와 함께 가기를 선택하는 셈이다. 바로 이 점에서 전대한의 음악비평은 아주 새로운 유형의 음악 글쓰기이다. 이러한 목표 아래 전대한이 오랜 기간 훈련해온 분석적이고 명료한 글쓰기가 빛을 발한다. 전대한은 골똘히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글로 『비개념원리』를 채워두었다. 독자에게 젠체하기보다 독자와 대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비개념원리』는 우리가 할 말을 대신해주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할 말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그러니 『비개념원리』를 풀어보자. 음악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고 싶다면. ― 이동휘(워크룸프레스 편집자) 이론연구자로서 남의 이론을 이해하고 내 설명을 정교하게 다듬는 작업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례에 소홀해진다. 전시에서 보는 작품이든 실생활의 경험이든 사례는 나의 설명방식을 지지하기 위한 ‘근거’로서 부분적으로 다뤄질 뿐이다. 마음 한켠에는 분석미학의 방법론과 이론을 구체적 사례에 적용했을 때 작품과 그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지만 연구자로서 먹고살기에 허덕이는 사이, 그 바람은 점점 희미해져간다. 전대한은 나의 희미해진 바람을 ‘논증적 태도’와 ‘단단하고 분명한 문장’뿐 아니라, 대중음악과 그를 둘러싼 말들을 놓치지 않는 ‘현장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실현하고 있다. 이 시도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면, 도해가 글을 조직하는 방식에 있다. 도해와 글의 배치를 통해서 독자는 주어진 문장을 읽고 이해하기를 넘어서서 텍스트의 논리와 도해 사이의 밀착도와 간극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의 논리를 시각화하는 방식을 상상하면서 텍스트에 다른 방식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된다. 때때로 언어를 통해 이론적 지식을 전달하는 일의 한계에 대해 고민했는데, 이 책에서 일어나는 글쓴이, 디자이너, 만화가의 협업은 고민에 고여있던 나에게 모처럼 기분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다. ― 임수영(분석미학 연구자) 책의 차례미리 읽기『비개념원리』는 ‘비개념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음악비평에 대한 나의 예증이자 실천이며, 논증적 태도를 대중음악비평에서 견지해내기 위한 나름의 분투다. 달리 말하자면 『비개념원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논증적으로 말하기 위한 시도다. 나아가 『비개념원리』는 우리의 음악적 경험에서 포착되는 비개념적인 것들의 원리를 명료하게 규명해보려는 시도다. 어쩌면 ‘비개념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대중음악비평을 수행하는 동시에 논증적 태도를 견지하겠다는 욕망은 헛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 ‘비개념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음악비평은 자체로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음악비평은 필연적으로 미끄러지고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음악을 듣고, 음악에 관하여 말하고 쓰고자 한다. 비개념을 개념화하겠다는 모순을 껴안고서. ― 서문에서이러한 대안이 성공적인지와 별개로,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름’은 생각보다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중음악에서의 이름은 자주 별 이유 없이 붙여진다. 그러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 있거나 정체를 알기 어려운 이름이 있다면, 한 번쯤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몰아붙여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러니까 더 이상 들려 오는 음악의 장르명이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지지 않길 바란다. ― 후기에서음악에 관하여 말하거나 글을 쓰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음악을 ‘들어야만’ 한다. 즉 음악 비평은 ‘듣기’라는 음악에 관한 지각 경험을 필연적으로 선제한다. 그렇게 나는 무언가를 듣는다는 것, 더 나아가 무언가를 ‘지각한다’는 것에 관하여 검토하기 시작했다. (...) 사실 이러한 글들은 지각 철학으로서의 미학에 대한 내 나름의 실천이기도 하다. 분석미학과 음악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미학의 많은 문제들이 결국 심리철학(특히 지각철학)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게 되었다. ― 후기에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구를 허구적으로 논하는 ‘담론’까지 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비평과 이론의 외피를 썼다면 그러한 방식은 문제적이다. 비평을 구성하는 판단과 평가에는 언제나 이유가 필요하고, 그러한 이유는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이론을 구성하는 논증은 언제나 주장과 근거로 구성되고,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정당화 관계여야만 한다. 이유 없는 비평과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 없는 이론은 어디까지나 취향에 대한 선언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이론과 비평이 오직 그것이 허구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으로 인해 그러한 이유와 정당화를 면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허구이자 신화이다. ― 후기에서그러나 비평과 이론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허구를 허구적으로 논하는 이들은 대개 합리적인 이유나 정당화자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많은 경우 또다른 허구로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래서 “허구(fiction)”라는 개념을 ‘허구적으로’ 논하려는 몇몇 이론과 비평을 보며 매우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비평과 이론의 외피를 쓰고서도 허구를 허구적으로 논하는 이들은 실리만 취하고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냥 허구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이론과 비평으로부터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들을 마구잡이로 도입하면서도, 정작 비평과 이론에게 전제되는 엄밀함이나 합리성과 같은 것들을 요구받을 때는 ‘이건 (허구에 관한) 허구니까 그런 것쯤은 없어도 괜찮아’라고 쏙 내빼는 모습이 짜증났다. ― 후기에서요컨대 ‘노이즈의 역설’은 대전제로 삼고 있는 명제가 야기하는 문제로 인해 ‘말이 안 되는’ 역설이 된다. 오히려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이름의 역설’이 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이즈의 역설’은 역설이 제기하는 결론(노이즈는 모순적이다.)이 정합적으로 제시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역설로서 성립할 수 없다는 자기역설에 빠진다. ‘노이즈의 역설’은 사이비역설에 불과하다. ―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사이비역설에 관하여」에서그럼에도(물론 음악의 속도 외에도 몇몇 지점에 대한 음악가나 2차 창작자의 개입이 있긴 하지만) 왜 우리는 스페드업과 슬로드리버브처럼 의도된 빠르기가 고정된 어떤 음악을 임의로 빨라지게 만들거나 느려지게 만드는 데 매력을 느끼는가? 나아가 특정한 음악의 속도를 가속 혹은 감속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가 대체 왜 원래의 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매력이나 가치를 산출하는 음악적 실천이 될 수 있는가? 물론 수많은 기사와 칼럼이 논하듯 이는 일차적으로는 음악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플랫폼의 변화 때문이겠지만 그러한 설명이 가속 혹은 감속된 음악의 매력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은 음악을 극단적으로 가속하거나 감속시키는 스페드업이나 슬로드리버브와 같은 동시대의 음악적 실천에 관한 다른 설명방식을 모색하고자 한다. 나는 음악의 빨라짐 혹은 느려짐이 음악에 대한 기존과 다른 방식의 국면 지각(혹은 다른 방식의 국면 듣기)을 촉발하기에, 청자에게 새로운 음악적 가치와 매력을 산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음악의 가속 혹은 감속이, 고정되어 있던 속성인 음악의 속도를 변화시켜서 매력적인 것이라기보다 음악이 담지한 다양한 국면들(aspects)을 포착하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치를 산출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요컨대 음악의 가속과 감속이라는 동시대의 음악적 실천을 통해, 특정한 음악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그보다 빨라지거나 느려진 음악으로부터 우리는 또 다른 음악적 국면을 마주한다. 스페드업과 슬로드리버브 같은 음악적 실천은 이제 우리에게 다른 음악적 국면을 포착하며 그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음악을 낯선 동시에 익숙하게 듣도록 해준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 듣기(Ways of Hearing)을 넘어선 다른 국면으로 듣기(Aspects of Hearing)다. ― 「다른 국면으로 듣기」에서그러나 이민휘의 음악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말들과 달리, 나는 『빌린 입』과 『미래의 고향』이 어떤 이야기 혹은 서사로 환원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러한 의미론적 접근은 이민휘의 음악이 무엇을 함축하는지 해석하고자 했던 여타의 비평적 시도들에 의해 앞서 보았듯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나까지 이민휘의 음악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를 추적해 보는 탐정 놀이에 참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와 같은 환원은, 정구원이 지적했듯, “음악에서 언어가 소리로 전환되는, 아주 짧은 그 순간에 약동하는 활력”을 탈각시키는 “강박적” 접근에 불과하다. 조금 더 보태어, 음악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음악이 당연하게 무언가에 대한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전제를 참으로 상정하는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내 의구심은 이민휘의 음악이 재현하는 내용을 둘러싼 여타의 비평적 시도들과 달리(즉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와 관계 없이) 이민휘의 음악이 어떻게 재현으로서 작동하는지에 관한, 구문론적 지점에 위치한다. 이민휘의 음악은 어째서 자연스레 무언가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가? 혹은 『미래의 고향』이나 『빌린 입』은 왜 당연히 하나의 서사로 환원되는가? 달리 말해, 내게 중요한 물음은 ‘이민휘의 음악은 어떤 이야기인가?’나 ‘이민휘의 음악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가 아니라 ‘이민휘의 음악은 (대체) 왜 이야기인가?’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답은 ‘이민휘의 음악은 재현 혹은 허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이민휘의 음악이 재현 혹은 허구가 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비평적 시도들과 함께 이민휘의 음악이 어떠한 내용의 재현 혹은 허구로 치환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민휘의 음악을 재현의 일종으로 자연스레 수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이민휘의 음악이 청자에게 제공하는 허구적 경험에 대해 살펴볼 것이며, 나아가 음악이 어떤 기전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의 허구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일반화해 볼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이민휘라는 구체적 사례로부터 음악적 허구를 위한 정초 놓기를 목표로 삼는다. ― 「음악적 허구를 위한 정초 놓기」에서그런데 이민휘의 음악이 이야기처럼 보이는 현상, 혹은 하나의 서사와 쉽게 동치되는 상황을 이와 같이 이해했을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가? 어쩌면 누군가는 이 글이 지금까지 제시한 논의가 제자리걸음에 불과하다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결국 이 글은 많은 사람들이 애초부터 모두 참이라고 생각했던, ‘이민휘의 음악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진술이 실제로도 참임을 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론은 생각보다 사소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이야기가 된 수많은 음악들을 설명할 이론적 틀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위에서 내가 (볼드체로) 강조했듯, 이민휘의 음악은 앞서 언급했던 다양한 음악 내/외적 방식을 통해 이야기가 ‘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이민휘의 음악은 자체만으로는 특정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지만, 특정한 조건이나 상황 하에서는 이야기 혹은 서사로서 기능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조건은 곧 ‘청자가 음악을 소도구 삼은 허구 작품의 감상자 혹은 샌드박스 게임의 플레이어……가 될 때’이다. 즉 누군가가 이민휘의 음악이 왜 이야기인지를 묻는다면 그 답으로 우리가(혹은 청자가) 그렇게 규정된 게임에 참여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음악적 허구를 위한 정초 놓기」에서이 책의 또 다른 좋은 점글마다 주로 언급되는 음악들을 세트리스트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출간축하회에 오시면 함께 들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