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는 쪽프레스 편집부에서 비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코너입니다.Title 숲과 속Writer 김미래 @miraeseoul“길은 숲 속에서 반시간 정도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야만 했다. 이 길까지는 달빛이 거의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는 다른 동물들의 소리처럼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 조심 걸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숲 속에서 나오니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다.”(마를렌 하우스호퍼, 『벽』) 『벽』 자세히 보기 이 부분의 교정을 보다가 속도를 늦추었다. 편집자의 일은 절반 이상이 글의 무언가를 고치는 것인데, 이 무언가의 절반 이상이 경험상 띄어쓰기에 해당한다. 글을 쓸 때, 우리는 어떤 말은 앞말과 띄어 쓰고 어떤 말은 앞말과 붙여 쓰기로 한 규칙 아래 놓인다. 그리고 눈치챘겠지만, 띄어 쓰는 일은 띄어 쓰여 있다가도 하나의 일로 규정될 때 ‘띄어쓰기’라고 붙어 지내라는 명을 받는다. 일련의 말들을 붙이고 쓰는 것이, 띄고 쓰는 것이, 누군가의 일과이자 직업이 될 때, 이 행위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낱말이 된다. 내가 놀이로서 글을 쓸 때 나는 낱말을 붙여 쓰기도 띄어 쓰기도 하겠지만, 직업으로서 할 때는 ‘붙여쓰기’와 ‘띄어쓰기’를 틀림없이 해내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사전을 몇 차례 뒤져서 ‘숲 속’은 붙였고, ‘반시간’은 띄었으며, ‘울음소리’는 그대로 놔두었고, ‘조심 조심’은 붙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달라진 게 뭔지 얼핏 봐서는 알기 힘든 하나의 단락을 최종적으로 남겼다. “길은 숲속에서 반 시간 정도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야만 했다. 이 길까지는 달빛이 거의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올빼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소리는 다른 동물들의 소리처럼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는 조심조심 걸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숲속에서 나오니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숲속은 붙여 쓴다. 떨어져 있던 ‘숲’과 ‘속’을 붙여 놓자, 숲의 안쪽이라는 공간이 전보다 고유하게 느껴지며, 숲의 표면은 특정한 초록으로 칠해졌고, 그 안쪽 역시 특정한 짙은 초록이 가득 메웠다. 그 숲의 어둑한 안쪽 공간, 아무도 숨긴 적 없지만 이미 숨어 있는 그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개별적인 이야기가 이제 막 탄생할 것만 같다는 기대감이 인다. 숲속은 붙여 쓴다.따로 뜻이 있는 한 글자 단어 둘이 묶여서 오도 가도 못할 때의, 그 둘 사이의 난처함이 좋다. ‘숲’과 ‘속’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므로 이제는 ‘숲속’을 생소하게 느끼고 전혀 새롭게 배우라는 듯한, 하나의 낱말이 된 그들의 위풍당당한 기세가 좋다. ‘숲’에 있어서는 ‘속’이, ‘속’에 있어서는 ‘숲’이 쉽게 대체되지 않는 짝으로서 굳건할 때, 그들의 자리가 제자리라고 믿어질 때, 나는 사전 편 보람을 기분 좋게 음미한다. 모든 걱정이 떨어져 나간다. 우리가 쪼개지지 않는 한 덩이라고 의심 없이 믿는 것. 이를테면 ‘골짜기’와 ‘얼굴’ 같은 박힌 돌들도 한때는 둘이었다.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한 덩이로 보였던 것이 이제는 세넷 이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애써 선조들이 쪼개 놓은 것을, 나름의 이유로 땜질하여 붙이는 후손이 있는 것이다. 애써 선조들이 붙여 놓은 것을, 나름의 이유로 떼어 놓고야 마는 후손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숲속’은 숲속이라고 쓰기보다는숲속이라고 쓰는 편이 어울리겠지. 갑갑한 구속과 든든한 연결, 우리는 이 속에서 정말 오랫동안 줄타기를 해 왔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모든 떨어진 단어를 붙이고 싶다고 느끼고 있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로부터 떨어져 나왔음을 방증하는 것일까. 단순히 떨어져 나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단단하고 따뜻하고 믿음직한 것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깊고 무겁고 단단하고 큰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뒤에 나는 비슷하거나 더 좋은 것을 찾아 꽤 헤맸다. 그런데 제대로 된 데로 정착하기도 전에 나의 몸에 더 여리고 가벼우며 간지러운 것들이 들러붙어 버린 것을 느끼는 때가 있다.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방금은 모든 것을 붙이고 싶다가도 지금 당장은 아쉬울 것 없이 체념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아주 어린 시절에는 동화로, 조금 더 커서는 소설로 읽었다. 여자고등학교 1학년 때 2, 3학년 선배들이 꾸민 연극을 보고 나서야 그 작품이 본래 희곡인 줄을 알았다.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니면 끼어들지 않는 지문이 간간이 등장하는, 그 긴 말들의 향연이 설렜다. 정성스레 외운 것을 한 자 한 자 오해할 수 없게 발성하는 배우들처럼 우리가 단지 한마디의 말을 고심하여 계획하고, 그 하나의 대사는 우리의 세계관을 드러낼 수밖에 없던 시대가 있었다고 믿는 낭만에 취해서. 몇 번이고 같은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때까지도 나는 ‘한’과 ‘여름’과 ‘밤’과 ‘꿈’을 어디서 붙이고 어디서 띄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내 마음속 그 이야기는 ‘어느 한 밤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틀린 걸 알고 나서도 속으로는 <한 여름밤의 꿈>이라 읽고 썼다. 그 환상적인 이야기의 믿을 수 없음을, 그 어마어마한 사건성을 무성의하게 언급하며 지나쳐 버리는 ‘한’이라는 관사가 내 머릿속에는 꼭 필요했다. 깊은 밤은 한밤이라고 붙여 쓴다. 더위가 한창인 여름은 한여름이라고 붙여 쓴다. 내가 어떨 때 그들을 떼어 놓고 싶어 하는지, 내가 어떨 때 그들을 붙여 놓고 싶어 하는지, 나는 요령 없지만 그렇다고 미움은 받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오래도록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