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읽는에릭로메르: 영화관에서처럼 동시에 읽기는 힘들겠지요, 그럼에도 함께할 수 있다면Title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생각을 찍는 게 가능한가요: 『사계절 이야기』 중 「봄 이야기」Writer 정성일(영화평론가)¶ 일부러 저는 지금 에릭 로메르의 계절 사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 「봄 이야기」를 쓰면서 영화를 다시 보지 않고 (지금 당신 손에 들려 있을지 모르는 책의) 첫 번째 자리에 놓여 있는 시나리오만을 읽은 다음, 쓰고 있습니다. 아주 천천히 다시 읽었습니다. 무언가를 분석하면서 읽으려고 하는 대신 대사와 지문을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장면은 선명하게 떠올랐고 어떤 장면은 거의 대사와 이미지가 뭉개져버린 듯 윤곽이 불분명하게 서로가 서로를 덧칠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중얼거렸습니다. 단지 이것이 기억의 문제일까.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는 소설을 읽듯이 시나리오를 읽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로, 할 수 있는 한 독서에서 빠져나와 영화를 보듯이 문장을 따라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마 반문하실 겁니다. 그런 독서가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건 에릭 로메르(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볼 때마다 종종 하나의 신 안에서 이미지와 대사의 경계가 서로에게 간섭하듯이 이루어진다는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인상. 마치 정물화를 바라보듯이 일상생활을 진행시켜나가고 있는데도 거기서 우리가 가져보는 감정 안의 낯선 긴장과 방금 본 관계로 되돌아왔을 때 갑자기 거기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새로워진 것만 같은 순간과 마주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어떤 관찰의 감각. 이를테면 애인 마티유 집에 머물고 있던 잔이 자기 집에 겨울옷을 가져다 놓고 봄옷을 챙기러 왔을 때 그 집에서 잠시 머물고 있던 사촌 기엘의 남자친구 질다가 샤워를 하고 무심코 속옷 차림으로 나오던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다소 민망하게 가볍게 웃으면서 그저 누구라도 그 장면을 그저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잔은 그 반대의 자리에 가게 됩니다. 파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는 사촌 기엘과 남자친구 때문에 갈 수 없고, 다른 또 한 채의 (출장을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빈 상태인) 애인 마티유의 텅 빈 집에는 가기 싫은 난처한 상황에서 파티가 있던 그날 밤, 잔에게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나타샤는 자기 집에서 오늘 밤을 함께 지내자는 호의를 베풉니다. 나타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학교에 등교하고 잔은 이제 빈 집에서 여유롭게 샤워를 합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여자친구 집에 머문다고 알고 있던 나타샤의 아버지가 로마 출장을 가기 위해 짐을 챙기러 갑자기 방문합니다.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여기서 인상은 어디서 발생합니까. 영화를 보는 우리,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나의 기억 안에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때 이 반복이 앞의 장면을 그대로 카피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사건이 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겁니다. 거기서 되돌아와서 이 장면을 시나리오로 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나요. 영화를 볼 때는 대사가 이미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를 읽자 대사가 이미지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대사들은 미장센으로 거기에 있는 디테일들, 그중에서도 봄의 기호인 꽃을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미지와 그 안에서 말하고 있는 인물들이 가져보는 정감의 기복들, 말하자면 다가오고 있거나 다가가고 있는 사랑과 미움, 질투, 의심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에릭 로메르의 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심 안의 의심 사이를 매개하고 있었습니다. 에릭 로메르는 계절 사부작을 시작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일기예보를 정말 좋아해요. 왜냐하면 종종 틀리기 때문이지요.” 여기서는 마치 봄의 기운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잔과 우연히 만난 나타샤. 나타샤의 중년이 된 아버지 이고르, 이고르의 젊은 애인 에브가 각자의 방식으로 거듭해서 변덕을 부립니다. 이때 변덕은 더도 덜도 아닌 봄의 감흥입니다. 아마도 무겁고 두터운 겨울과 금방 모든 일에 지쳐버리게 만드는 여름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절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때 방점은 바로 그 사이, 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기로 다가온 사람들, 그 사람들의 마음. 심지어 그 마음의 주인들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변덕, 그렇게 에릭 로메르는 한 바퀴를 회전합니다. 그저 떠올려주십시오. 이 이야기는 잔의 남자친구 마티유의 집에서 시작해서 다시 마티유의 집으로 돌아온 잔의 장면에서 끝납니다. 우리는 마티유라는 이름이 계속 나오는데도 영화에서 정작 그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이 생겼지만 사실 「봄 이야기」가 정말 굉장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마티유가 끝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가 텅 빈 공백 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얼 찍은 것인가요. 모든 등장인물들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되는 생각들. 그걸 영화로 찍는 게 가능한가요. 그래서 에릭 로메르는 대사를 찍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대사와 행위 사이의 분리와 변덕의 이중주가 진행됩니다. 어느 쪽에 진실이 담겨 있는가, 라는 내기. 어느 쪽을 따라가야 할 것인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대사를 믿으면 안 됩니다. 지금읽고 계신 것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입니다. 칸트 철학의 ‘선험성과 초월성’에 관해 토론하는 긴 대사가 나오지만 감정의 진실은 감자를 썰고 살라미를 다듬는 손에 있지 않던가요. 입과 손, 대사와 행위. 시작하자마자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의 악장이 들려오는 것은 계절의 신호이기도 하지만 피아노와 바이올린으로 분리되어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는 하나의 하모니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읽어나가면서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종종 인물들의 관계가 실타래처럼 엉켜버렸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 문제가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 마치 음모가 개입하기라도 한 것처럼 종종 어떤 제스처, 가끔 어떤 억양, 그리고 어떤 몸짓이 의심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음모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한복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 나타샤 할머니의 목걸이 이야기.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저 맥거핀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지는 그 목걸이. 아마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에릭 로메르는 히치콕 영화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심지어 그의 동료인 샤브롤과 함께 히치콕에 관한 책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히치콕의 그림자는 내내 영화 로메르의 영화 속을 어슬렁거리면서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읽고 계신 이 이야기는 어느 영화보다도히치콕적인 대사와 상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다 알고 있다는 듯 웃음 짓던 우리 앞에 갑자기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순간, 눈물을 흘리는 잔을 보면 누구라도 당황할 것입니다. 눈물이라는 감정. 눈물이라는 고백. 이 순간 에릭 로메르는 자신의 영화를 히치콕으로부터 구해냅니다. 저는 당신이 가져볼 놀라운 이 순간의 전율을 훔쳐가지 않기 위해 여기서 이야기를 멈추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조언을 하겠습니다. 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교향적 연습곡」을 들으시기를 권합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제가 고마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