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읽는에릭로메르: 영화관에서처럼 동시에 읽기는 힘들겠지요, 그럼에도 함께할 수 있다면Title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희극과 격언1』 중 「비행사의 아내」Writer 임세은(영화평론가)¶ 로메르의 영화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설명하려는 인물과 만날 수 있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사건은, 그래서 대화다. “네 욕망을 정탐하라.” 로메르의 주인공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제 욕망의 정체를 탐색하고 발견한다. 마치 돈키호테 같은 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자신만의 공상을 펼치고 현실가능성을 염탐하며 작은 모험을 벌인다. 「비행사의 아내」는 한 젊은 남성의 어떤 하루를 등장시킨다. 제목 ‘비행사의 아내’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진으로 잠깐 등장한다. 그녀는 로메르가 개인적으로 음악적 우정을 나눈 사람이자, 「갈루아인 페르스발」에서 플루트 연주자로 등장하는 미국인 데보라 나단이다. 탐정 영화의 함정처럼(히치콕의 두 영화, 「현기증」과 「이창」의 제임스 스튜어트가 처한 상황처럼) ‘비행사의 아내’는 영화의 눈속임이다. 프랑수아가 쫓는 것은 우연히 만난 안의 전 남자친구 비행사 옆에 있던 금발 여인의 정체가 아니다.로메르는 최초의 연작인 여섯 편의 ‘도덕 이야기’를 끝내고, 「영국 여인과 공작」과 「갈루아인 페르스발」이라는 다소 다른 영역의 모험을 거친 후, 다시 ‘희극과 격언’이라는 연작으로 되돌아오는데, 「비행사의 아내」는 그 첫 작품이다. 로메르는 자신이 좋아했던 발자크의 『인간 희극』처럼 매우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연작을 기획한다. 일상적인 이야기에 연극의 희극성을 더하고, 다큐멘터리적인 형식 아래 픽션을 숨기고, 자전적인 요소를 가린다. 문학적인 영향을 받은 이야기(콩트)는 사라지고 연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코미디(희극)가 된다. 화면 밖 목소리 해설은 사라지고 아이러니한 ‘상황성’이 중요해진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의 희극성에 주어진 격언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이다. 영화 후반부, 안의 방에서 30여 분간의 긴 대화가 이어진다. 안은 프랑수아에게 묻는다. 안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프랑수아 → 아무것도 아냐. 넌 아무 생각도 안 할 때 없어?안 → 없어. 난 항상 무언가를 생각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파스칼의 책 『팡세』의 ‘내기’를 인용해가며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던 트랭티냥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프랑수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로메르는 우리에게 모순적인 격언과 만나게 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마 안의 말처럼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이 정말 ‘나’의 생각일까? 어쩌면 악마가? 혹은 누군가가 마음속에 던진 것이 아닐까? 아니, 정말 나의 ‘생각’인 걸까? 혹시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의 소리는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프랑수아가 제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문장이 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러니까 정말 문제인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희극과 격언’ 연작은 ‘도덕 이야기’ 연작과 다르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 파스칼에 대한 지적인 담화를 나누던 주인공들이 더는 등장하지 않는다. 모순적이고 기묘한 방식이긴 하지만 지적인 확신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인물의 대화는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삶을 토로하는 데 그친다. 개봉 당시 프랑스의 한 비평가가 크로크무슈를 둘러싼 진부한 대화에 아연실색한 일도 있었다. 인물들은 더욱 평범해지고 그들의 대화는 더욱 상투적이 되었다. 로메르적인 인물은 거대한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평범한 소시민에게 보장된 유일한 유토피아는 연애의 성공이라는 듯 미시적인 이야기에 집착한다. 과거의 돈키호테적 이상을 간직한 평범한 현대인의 무용담은 오직 연애 사건을 통해 일어난다. 오프닝 장면 우편물 분류센터의 작업장 노동자들처럼, 마지막 장면 동역 주변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마지막 아리엘 동발이 부르는 샹송 「파리는 나를 유혹해」의 가사처럼 말이다. 수많은 자갈 중 하나가 된 나, 길 위에 나뒹구는 플라타너스 잎사귀는, 지하철역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저 높이 떠오르는 태양에서 멀어져만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