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 PINK REVIEWWriter 윤아랑(평론가)¶ 먼저 한 가지 글을 소개해드릴 텐데요, 이건 제가 2019년에 쓴 '오카자키 교코, 소란스런 90년대'란 짧은 글입니다. 일부분만 읽어드리겠습니다. ¶ "친구다운 친구, 가족다운 가족, 사회다운 사회라는 '상식적인' 집단적 바탕 없이 거의 단독자로 존재하는데다, 개성들에서 흘러나오는 자극에 휩쓸려 '상식적인' 삶의 감각이 무뎌진 그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좀비처럼 보인다. 아니, 분명히 좀비이다. (……) 개성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지만 실체적 행위는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90년대가 중요하다면 그건 그 이전의 것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감각이 가속회로 속에서 고속으로 운동하게 된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오카자키 교코는 진단한다."네, 이 당시 저는 오카자키의 작품들을 냉소, 몽상, 탈정치, 포스트모던에 대한 '진찰'의 만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다른 글을 또 하나 소개해드릴게요. 이건 제가 2023년에 쓴 '치와와와 부정적인 통일'이란 글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제가 공저로 참여한 악인의 서사에 실었던 글의 일부예요. 일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오카자키는 일반 사회의 가장자리를 떠도는 어리숙하고 천박한 캐릭터들(학교 폭력을 당하는 게이 소년, 교사를 성적으로 협박하는 학생 커플, 비혈연 근친에 빠져 양부모를 살해하고 여행을 떠난 남매 등)을 끈질기게 따라가면서도 그들의 삶을 (흔한 오해와는 달리)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찬 모종의 스펙터클로 만들지 않는다. 삶에 대한 그들 태도의 어리석음, 사랑스러움, 낭만, 경악스러움, 냉소 모두를 포괄해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만화가로서 오카자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요컨대 오카자키 교코의 만화는 (도덕의 구축 자체는 존중하면서도) 도덕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전부가 되려는 것에 대한 나름의 저항으로서 숭고한 (그리고 그만큼 황당무계한) ‘조작’이다. 도덕이 결코 충분히 이해하고 포괄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있다고, 혹은 도덕 바깥에서도 삶은 여러 갈래로 계속되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기."¶ 네, 이때 저는 오카자키의 작품들을 욕망, 사랑, 긍정에 대한 '조작'의 만화라고 하고 있죠.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여러분도 느끼고 계실 겁니다. 이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 저는 새삼스레 오카자키에 대한 제 관점이 변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전자라면 오카자키는 아주 잔혹한 작가이고, 후자라면 사랑에 과도할 만큼 충실한 작가겠죠. 근데 그 다음엔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두 관점 모두가 번갈아 나타나거나 뒤섞이는 게 오카자키 교코의 만화가 아닐까? 그러니까 한 쪽이 틀렸다기 보다는, 두 독해 모두 가능케 하는 무언가가 오카자키의 만화에 있는 게 아닐까? 둘 사이의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얘기할 수 있을 터이니, 여기서는 잠시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 음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오카자키의 출세작이라 할 장편만화 『핑크』(1989)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핑크』를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캐릭터들 각자의 욕망이 재현되는 방식이에요. 근데 이상한 게, 인물들이 가진 욕망이 그들에게 종속된 게 아니라, 마치 그들이 처한 심리나 환경을 넘어 자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듯해요. 가령 유미가 성노동에 뛰어든 게 (물론 작품 안에서 이걸 직접 설명해준 적은 없지만) 삶이 너무 팍팍하고 다른 노동을 하기엔 능력이 달려서, 가 아니라 악어를 계속 키우는 데에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일이고 또 유미가 좋아하는 “나쁜 일”이기 때문인 것처럼요. 즉 내가 욕망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욕망이 나를 통제하는 거죠. 사실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스불재’라는 말이 있듯 제 욕망에 충실하다가 큰 코 다친 사례들은 언제나 있어왔고 그걸 문제시하려는 학자들도 꾸준히 있어왔으니까요. 근데 『핑크』를 비롯한 오카자키의 만화들이 크리티컬한 건, 그런 욕망을 실행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대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얼마 전 개봉했던 「비닐하우스」(2023)를 떠올려볼까요. 여기선 간병사 일을 하고 있는 문정(김서형)이 실수로 자기가 모시던 알츠하이머 노인을 죽여요. 그런데 충분히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음에도 신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한테 곧 소년원 출소 예정인 아들이 있고, 엄마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본인은 비닐하우스에서 겨우겨우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처지에서 조사를 받고, 생업도 끊기고, 최악의 경우 자기가 감옥에 들어간다? 완전한 파국뿐이죠. 이런 처지가 야기한 욕망으로 인해, 문정은 사건을 은폐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아주 추악한 악당이 아닌 캐릭터가 잘못을 저지를 때 우리는 보편적으로 그릇된 욕망을 추동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서 근거를, 달리 말해 그에게 독자/관객/수용자로서의 ‘내’가 이입한다는 걸 덜 불편하게 만드는 방어기제를 깔고 들어가곤 합니다.혹은 크리스토퍼 놀란은 「메멘토」(2001)를 만들 때나 「테넷」(2020)을 만들 때나 ―최신작인 「오펜하이머」(2023)는 아직 안 봤고 아마 자의론 안 볼 것 같으니 넘어가겠습니다― 비슷하게, 상반된 가치관 사이에서 문자 그대로 ‘죽도록 고뇌하는’ 인간상에 집착하죠. 어떤 맥락에선 이 역시도 캐릭터와 관객 사이의 심리적인 간격을 유지하려는 방어기제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엔 ‘인간다운 인간이라면 고뇌한다’는 상식적(common sense) 사고관이 있기 때문이에요. 「다크 나이트」(2008) 후반부, 선박들이 자기의 ‘공격권’을 포기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놀란은 사람들의 상식적 사고관에 호소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 작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를 싫어하긴 하지만요. ¶ 근데 『핑크』만 봐도, 오카자키는 그런 방어기제를 전혀 안 깔잖아요? 이야기꾼으로서 오카자키가 특이한 건 욕망을 방어할 뚜렷한 근거를 대지 않으면서 욕망을 충실히 재현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로 인해 스스로가 곤경에 처하거나 심지어는 자멸할 수도 있다는 걸 아는데도 하고야 마는, 서로 반대되는 방향의 상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모순을 가진 욕망을 심리적 갈등 없이 수행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이에요. 그래서, 169쪽을 잠시 봐주시면, 이 작품에서 유미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잖아요? 고객들이 자기 앞에서 보여준 모습과 TV에서 보여준 모습이 너무 다르다고요. 이를 인간이 타인 앞에서(연출이라기 보단) 수행하는 모습들 사이의 괴리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근데 이건 사실 유미도 마찬가지고요. 과연 ‘빨리 누군가의 부인이 되고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상상과 ‘왕자님 따위 기다릴 수 없다’는 상상은 고스란히 같은 선 위에 올려질 수 있을까요. ¶ 가장 결정적인 사례로는, 이번엔 240~243쪽을 봐주시면요, 유미의 반려 악어를 죽이고 그 가죽으로 가방을 만든 새엄마를 유미가 야구 배트로 마구 패는데, 케이코가 말리면서 “못되고 끔찍한 여자라도 나한테는 엄마란 말야”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미가 물러나자 왜 그랬냐고 묻는 케이코에게 새엄마는 이렇게 말하죠. “미안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 오카자키는 ‘그러고 싶어서’ 말고는 뚜렷한 이유를 댈 수 없는 채로 욕망을 표출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말해, 근거나 통일성도 없이 활동하는 욕망의 역량을 보여주는 걸 목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멀리로는 ‘시간’에 연관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배 서리 일화처럼, 가까이로는 ‘무의식’과 연관된 자크 라캉의 분열된 주체처럼 말이예요.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욕망의 그래프를 구체적으로 그리는 게 난해한 궁극적인 이유란, 그것을 이루는 선분들이 논리적이고 통합적이고 세밀해서가 아니죠. 오히려 극단적으로 단순한 것들이 우리의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한계 속에서 중첩된 채 서로 마주쳤다 떨어지고, 얽혔다가 풀어지고, 상호작용을 일으키다 별안간 충돌하기도 하기 때문인 겁니다. ¶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욕망이 우리의 삶을 파탄 내고 파국으로 이끌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욕망 없는 삶도 파국에 이끌리곤 한다는 겁니다. 악어가 사라지고 난 후 유미가 정신병적 발작을 일으킬 때, 이번엔 220쪽인데요, 이다음에 유미는 하루오에게 남쪽 섬에 가고 싶다는 새로운 욕망을 표출합니다. 이때 하루오의 독백은 이렇죠. “유미에게 욕망이 생긴 것이 더 기뻤다.” 이때 악어는 실존적 고민을 억제하고 은폐하는 담보물로, 유미의 욕망을, 나아가 삶을 겨우 가능케 하는 판타지적인 담보물로 기능하죠. (처음에 악어한테 "너는 나의 스릴과 서스펜스"라고 하는 것처럼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부연하건대, 금방 “실존적 고민을 억제하고 은폐”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자극과 충격에 예민한 상태라면 우리의 삶은 매번 쇄신하는 게 아니라 금방 파국에 이를 거예요. 우리들의 욕망은 이런 이중의 역설에 놓여있습니다. 그 자유분방함으로 인간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지만 그것이 없어도 위기에 빠진다는 역설 말이죠.¶ 이때 이 작품이, 그리고 오카자키가 활동을 시작했던 게 버블 경제 시대이기도 한 80년대였다는 걸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유미가 가진 막연한 판타지, 이 아슬아슬한 삶이 하여튼 지속될 거라고 믿는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판타지는 당시 철학자들이 “소비의 사회”(장 보드리야르)로서 80년대에 일어났다고들 하는 '일상적인 것'의 전환에 대한 거부에서 기인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탱하고 가능케 하려는 방어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란 식의 틀을 세워보는 겁니다.(이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과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판이 절로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유미의 삶은 그런 ‘일상적인 것’의 전환, 『리버스 엣지』의 (윌리엄 깁슨의 시를 인용했다는)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평탄한 전쟁터”의 세계를 온몸으로 육화한 삶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죽어서 가죽가방이 된 악어라도 결국엔 내가 사랑하던 악어라고 받아들이는 것처럼요. 그럼 『핑크』는 당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의 현실감각이 변화하는 양상에 대한 예리한 비판으로 얘기될 수 있겠죠.¶ 그런데 전혀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유미의 삶을 적극적인 순응으로 보는 것 말고, 그런 삶을 마냥 단죄하지 말고 사랑스럽게 봐줄 순 없느냐고 강경하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말이예요. 여러분도 이 작품을 보면서 유미나 하루오나 새엄마나 케이코를 한심하게만 보시지는 않으셨잖아요? 오히려 모두를 연민하게 된다면 몰라도 말이죠. 오카자키는 그런 욕망에 휘둘리는 인간들이 엄연히 우리와 같은 세계의 ‘시민’이란 걸 납득시키려는 게 아닐까요? 나아가서 그런 인간들이 자신들이 속한 세계의 ‘증상’일 뿐만 아니라, 그럼으로써 세계를 문제시할 수 있는 ‘바이러스’ 같은 거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순응이냐 저항이냐로 손쉽게 구분되는 이분법이 아니라, 극단적인 순응이 외려 체제가 온전히 버틸 수 없는 특이점으로 작용하게 되는 거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유미 혹은 오카자키는 ‘공모’와 ‘반동’이 중첩될 수 있는 지점을 예리하게 파고든 작가라고 할 수 있겠죠. ¶ 이 두 가지 독해 틀의 가능성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당장 더 구체적으로 따져보거나 답을 내리진 않겠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 둘 사이의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얘기할 수 있을 터이니, 당장은 여기서의 간극 혹은 간격에 대해 잠시 음미해주시길” 바라요. 그 대신, 이 작품에 대한 말은 아니지만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어 발췌한 글을 읽어드리며 리뷰를 마칠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현재 영미권 최고의 소설가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조지 손더스의 강의록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중, 안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사람”을 분석하는 파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 “우리는 그녀를 반드시 용인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를 안다. (……) 우리는 그녀의 강점(그녀는 아주 충실하게 사랑한다)이 모두 그녀의 약점(그녀는 너무 충실하게 사랑한다!)과 연결되어 있고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사실 그녀에게는 선택이 아니라고 느낀다. 이것이 그녀라는 사람이고 그녀는 늘 그래왔다. (……) 그 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 (……) 그런데 보라, 그녀를 알게 될수록 너무 가혹하거나 섣부르게 심판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 신이 우리보다 나은 점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신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