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증언? 만화의 추모: CHIWAWA REVIEWWriter 정구원(평론가)¶ 조밀하게 나뉜 컷. 컷들을 가득 메우는 증언(이자 기억). 「치와와」는 오카자키 교코의 작품 중 형식과 스토리텔링의 결합이 가장 엄격하게 이루어진 작품 같습니다. 형식은 명백히 다큐멘터리의 것을 취하고 있어요. 만화의 컷을 영상의 컷으로 전환해 일렬로 배치해도 무방할 정도로, 「치와와」는 다큐멘터리적으로 이야기를 푸는 것만큼이나 형식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아랑 님께서 “「치와와」와 부정적인 통일”에서 짚으셨다시피 「치와와」에서 친구들의 증언은 치와와의 삶에 어떤 단방향 서사를 또 ‘사회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서사를 부여하기보다 그의 난잡한 삶을 단면적으로, 부분적으로만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 시선은 ‘저것들’의 하나인 모 평론가가 ‘정리’해 놓은 치와와의 서사와 대척점에 있죠.¶ “증인들은 말할 수 있는가?: 인터뷰의 철학에 대해”에서 히토 슈타이얼은 고다르의 『만사형통』과 『정치와 행복』을 예로 들며 증언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가 역설적으로 증언을 무력하게 만드는 딜레마에 대해 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말하는 노동자는 언론 매체에서 약간 열등한, 오히려 동정할 만한 사례로 인식된다. 그들은 변화가 아닌, ‘진짜인 것’에 관심을 갖는 관음증적 시선의 대상이 된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노동자들의 역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그들은 당사자들이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서의 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그 소리는 어떤 식으로든 사라진다.”「치와와」에서 이어지는 증언들은 이러한 무력함에 대한 어떤 저항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추모라는 강력한 목적이 (작품 자체든 작품 내의 다큐멘터리든)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증언들 모두는 치와와를 ‘전형적인 청년 비극’의 피해자로 평탄화시키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니까요. 증언들은 서로 배치되면서, 다정하고 성실한 모습과 약을 하고 돈을 꾸는 구제불능 같은 모습을 병치하면서, 단일한 서사를 부여하는 대신 선명한 각을 가지고 드러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 누구도 치와와에 관해 아는 바는 없었다. (……) 그러나 치와와 역시 자기 자신을 잘 몰랐을 거다(나도 마찬가지니까. 정말 안일하게도).” 이 독백이 다큐멘터리 형식이 지닌 한계나 불만족을 짚고 있다고 읽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요? 슈타이얼이 위 글에서 인터뷰와 증인이라는 형식에 태생적으로 내포된 의심스러움에 대해서 논한 것처럼 말이죠 “이 증언은 근본적으로 불투명하지 않은가? 주관적으로 착색되고, 이해관계에 좌우되고, 언어의 이미지에 유혹당하고, 자기만 옳다고 믿는 태도에 빠져 있지 않은가?” 여기에는 치와와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만큼이나, 타인을 온전히 안다는 일의 불가능성에 대한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고 믿어지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는. 다큐멘터리란 형식이 지닌 한계처럼 「치와와」의 모두와 우리는 치와와를 알 수 없죠. ¶ 그렇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냥 거기에 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작품은 마지막 순간 치와와가 버려진 바다에서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탈피해 다시 만화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을 두 페이지에 걸쳐 한가득 쏟아냅니다.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읽는 것이 원칙이지만, 꼭 그런 순서로 읽지 않아도 되는 치와와 친구들의 비선형적인 이야기들과 도쿄만의 작은 풍경. 이런 확장이 과한 짓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불가능성에 대한 체념보다 분명하게,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슈타이얼이 쓴 바처럼,¶ “증언들은 세계에 대해서 단순히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비로소 복구하기 때문이다. (……) 어떤 증언을 인지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으로 타자의 경험에 스스로를 열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 타인의 몸속의 고통을 느끼는 과제를 해내는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딛는 것이다. (……) 한마디로, 증언은 의심스럽고 당혹스럽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