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네일 그림 ⓒ silki 『비개념원리』 수록 솔직히 말하자면 음악에 대해서 글을 쓰는 일이란 정말이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재밌기야 무지하게 재밌더라도 단 한 번도 쉽다고 느끼지 못한 입장에서, 요새 더욱 골치 아프게 느껴지는 문제는 음악을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공통의 도구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재생할 때만 들려오는 주제에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기도, 가까스로 청취해낸 지점들을 그럴싸하게 말이 되게 옮겨오기도, 이를 혼자만의 헛소리가 아니라 타인과 나눌 수 있을 만하게 잇기도 무척이나 까다롭지요. 비평을 시도할 수 있는 다른 예술형식에 비해 음악이 상대적으로 비가시적인 탓일까요, 그 때문에 음악을 말과 글로 논하는 적절한 체계가 부실한 걸까요. 그런지라 음악에 대한 글은 어쩔 수 없이 음악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 주위에 덧씌워진 다른 무언가를 다루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글쓴이 본인의 취향, 끝도 없는 레퍼런스, 장르를 둘러싼 역사, 기술적인 전문용어, 업계인들의 트렌드, 음원성적과 조회수…… 그럼에도 음악이 들리는 대로, 또 그런 음악을 청취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비평을 쓰고 싶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매우 궁금합니다. 전대한이 비평을 쓰고 박지호가 도해를 짜고 실키가 선과 면을 입힌 『비개념원리』는 무엇보다 이러한 음악 글쓰기의 난국과 그 저변에 깔린 모순을 직면하고 돌파하려는 책입니다. 서문에서 밝히듯, 음악비평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이자 ‘쓸 수 없는 것을 쓰기’의 어려움과 잡도리하는 것이며, “비개념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메커니즘”을 발명하는 것이지요. 음악을 둘러싼 말과 글에 가득한 이 비개념들에 하나의 원리를 부여하고자 『비개념원리』는 분석미학적인 메타비평과 만화를 활용한 시각적 도식화라는 두 가지 도구를 고안합니다. 이 도구들은 특히나 상보적으로 호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각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열 편의 비평과 네 편의 꼭지가 실린 전대한의 본문은 크게 세 개 장으로 나뉘어 이름과 지각 그리고 허구를 다룹니다. 이 장들은 각각 우리가 주어진 음악을 지칭하고 청취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 기본적으로 무엇이 깔려 있는지를 검토하지요. 여기서 분석의 대상이 되는 개념들, 이를테면 장르명과 소음, 음악적 의미와 속도, 허구와 진정성 등은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당연시하고 넘어가지만 저마다의 오류와 한계를 지닙니다. 전대한은 성실한 논증을 통해 우리 청자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들 전제를 하나씩 헤집어보며, 그간의 토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때로는 얼마나 엉성한지 드러내 보이죠. 그렇지만 『비개념원리』가 오로지 잘 쓰고 있던 어떤 도구들을 불량이라 기각만 하는 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바탕으로 한결 엄밀해진 도구들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전대한의 비평이 지향하는 바지요. 개인적으로는 각 장에서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하이퍼팝」과 「음악 이해에 대한 지각적 관점을 제안하기」, 「음악적 허구를 위한 정초 놓기」가 특히나 그렇다고 강조하고 싶은데요. 표찰처럼 붙여지는 장르명을 자연종보다는 분류어로, 음악적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을 추론보다는 지각으로, 음악을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근거를 언어적 서사보다는 믿는 체하기로 이해해보자는 전대한의 제안은 우리가 음악을 부르고 듣고 말하는 방식에 다른 국면이 굳건히 자리함을 보입니다. 이렇게 『비개념원리』는 음악비평에 다양한 도구가 있음을 일깨울 뿐 아니라, 이런 도구들을 어떻게 익히고 써먹을지 또한 알려주는 책입니다. 한편 박지호·실키가 각 글에 맞춰 제작한 열 편의 도해는 분석미학이나 음악비평에 낯선 독자들에게 생소할 수도 있을 내용을 도식 겸 만화의 형식으로 옮겨옵니다. 『비개념원리』의 본문이 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쓰는 분석·비평적 도구라면, 이들 도해는 바로 그러한 내용을 논하는 시각·형식적 도구인 셈이지요. 이러한 변환은 단순히 해설이기보다는 오히려 번역이라 이해하는 편이 어울립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작업은 아무리 만화라는 친숙한 양식을 가져오더라도 전대한의 비평이 추구하고 구현하는 엄밀함을 유지합니다. 칸이나 스크롤 만화를 읽으며 익힌 만화 독서의 관습을 적극 활용하는 동안, 비평적 개념은 만화적 기호가 되고 각 명제는 개별 칸이 되며 논증과정은 칸의 연쇄가 되지요. 특히나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사이비 역설에 관하여」나 「다른 국면으로 듣기」, 「진정성은 허구다(positive)」의 도판에서, 온갖 기호와 칸의 종합으로 이뤄진 만화는 복잡하게 느껴질 만한 논증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는 제 나름의 비평적 도구이자 형식이 됩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도해 또한 우리가 만화독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온 읽기 도구들을 의심해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갈지자 모양으로 훑어내려가기보다는 회로도를 따라가듯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화살표나 좌우로 대비되는 주장들을 따라가게끔, 만화 기호들을 사물보다는 추상적인 관념의 재현으로 상상하게끔 유도하면서 말이죠. 앞서 『비개념원리』를 이루는 두 축인 비평과 만화가 상보적으로 호환 가능하다고 쓴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양쪽 모두가 분석미학적인 음악비평을 실행할 만한 “마땅한 방식 ……새롭고 적합한 형식”을 발명하는 덕에, 한쪽이 다른 쪽을 든든하게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죠. 만화만으로는 부족한 세부를 비평이 세밀하게 채우고, 비평만으로는 지나칠 만한 논증구조를 만화가 각인합니다. 물론 이 두 가지 텍스트가 그 어떠한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닐 테고, 어쩌면 독자는 양쪽에서 부족한 사항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홀로 설 수 없는 비평과 도해는 어떻게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쓸 수 없는 것을 쓰고자 하는 문제의식 자체를 환기합니다. 양쪽을 동등한 형식이자 도구로 활용하려는 이런 고집이야말로 곧 『비개념원리』가 “모순을 껴안고서” 주어진 문제를 풀어내는 태도일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비개념원리』는 ‘비개념적인 것을 개념화하는 메커니즘’으로 가득 찬 한 권의 도구상자입니다. 이 메커니즘은 분석미학이나 음악비평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이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논증과 개념일 수도 있고, 이를 시각화하는 만화 도해와 그를 구성하는 각종 칸과 기호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접근하더라도, 이 책은 미학과 비평, 또 만화에 호기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유용한 도구와 그 사용법을 안내합니다. 이 도구들을 손에 쥐고 또 귀에 끼운다면, 음악을 지금까지와는 좀 더 다르고 새롭게 청취하고 사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런 비개념들의 원리를, 이제는 우리가 함께 공리로 삼아볼 수 있을지도요. 결국 『비개념원리』의 결정적인 목표는 무엇보다도, 음악에 관하여 대화하기 위한 공통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