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육교 밑이라든가 공중변소와 가드레일 사이 같은 곳에 끼여 있어, 꼭 쓰레기처럼 보인다."
그들은 사회적인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어디에도 등록하거나 소속되지 않는다.
"전국 각지에는 상당한 수의 상자인간이 몸을 숨기고 있다."
상당수 존재하지만 언급되거나 회자되지 않는 것은 상자인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으면서 엿볼 수 있기에 호감은 물론 반감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상자의 이야기에 홀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인지, 말해진 것 중 사실은 무엇인지를 가늠하던 독자는, 캄캄한 상자 속 미아가 된다.
영원히 엿보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상자인간이 된 느낌도 든다
구석구석 관습과 유행과 타산에 지배되던 우리가 이 모두를 전부 내던져버린다면, 세계는 어떻게 보이고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풍경은 균질해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던 것과 무가치하게 여긴 것이 동등한 가치로 눈에 들어올 것이다. 상자인간의 전업이 카메라맨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상자에 뚫어놓은 엿보기용 프레임에 잡힌 세상은 그에게 매번 새로운 피사체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타인을 자유롭게 엿볼 수 있다는 양보할 수 없는 특권.
소설의 대부분은 주인공 상자인간과 그의 상자에 대한 '권리'를 구매하려는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실랑이를 따라가는 데 할애된다.
이성과 알몸으로 마주할 기회보다는 두 남녀를 상자 내부에서 엿볼 수 있는 시선의 주도권이 중요하다. 그러나 보이지 않고 본다는 것은 자유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감옥일까.
당신들을 포함해서 그 진찰실 자체가 내 상자의 낙서였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지 어떨지도 모르는 사건에 대한 공술서."
소설은 중반쯤 가서야 상자의 권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 자체가 온전히 상상의 소산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서로의 자리를 탐하고 가짜와 진짜가 혼란스레 공존하는 동안,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상자 안쪽을 빼곡 채운다.
(누구든 될 수 있는) '나'의 서술은 사진, 보도, 시, 우화 등 소설의 바깥을 내부로 끌어당기며 상자의 면적을 넓혀간다.
작가 탄생 100주년, 새로운 얼굴과 목소리로 만나는 2026년판 『상자인간』
그래픽디자이너 강문식은 원제 箱자의 윗부수(대 죽)만을 의도적으로 노출하여, 상자 안쪽으로부터의 강렬한 시선을 느끼게 설계했다.
어린 시절 읽은 아베 고보는 이해나 공감과는 멀었지만, 이상하게 끌렸고 불편한 만큼 오래 잊히지 않았습니다.
"상자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이 소설의 초반 문장은 절묘합니다. 겁을 주는 예고 같아요.
『상자인간』의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자인간』의 편집자가 되기 위해서는 만만찮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 역으로는 용기가 가상한 저였으니 일종의 『상자인간』이 된 셈일까요.
소화가 잘되는 유동식보단 내장을 괴롭히는 음식이 당기는 때가, 어쩌면 우리 편집부에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모든 말들은…… 이 소설을 권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무른 마음의 방증임을 눈치채셨겠지요.
불쾌한 장면과 거슬리는 시선이 적지 않은 소설입니다. 상자에 뚫어놓은 엿보기창으로 저는 숨으면서 멋대로 외부를 훔쳐보는 변태적 인간.
"당신들을 포함해서 그 진찰실 자체가 내 상자의 낙서였어."라니요. 나는 결국 나를 훔쳐보는 사람이 개발새발 그린 편집증적 낙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니요.
그러나 본다는 시선의 특권, 즉 상자의 권리란 상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쓸 때라야만 작동하는 것입니다. 고작 그런 것이 정말 자유일까요?
익명이라는 능텅감투를 뒤집어쓰고 댓글을 달 수 있는 자유 같은 걸 말하는 거라면 몰라도.이 책은 얼마간 절판되어 있었지만,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잊지 않았거든요. 잊지 않으면 있는 것을, 한 개인의 내부에는 당장 손으로 만져지는 것 말고도 여러 텍스트가 현재진행형으로 산다는 것을 압니다.
이 섬뜩한 책이 당신의 내면 어디를 파고들어 움틀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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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인간 · 아베 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