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이 선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이규태 산문집
그림 그리는 사람 이규태의 첫 산문집. 잘 그리는 법이 아니라 그림을 계속 그리며 사는 방식에 대한 책이다. 정면의 코를 얼버무리던 아이, 익숙한 오른손을 내려놓는 화가, 라씨 한 잔에 화를 냈다가 다음 날 사과하러 간 여행자는 모두 한 사람이다. 글 59편과 그림 83장, 단편 3작품을 담았다.
| 항목 | 내용 |
|---|---|
| 도서명 | 면이 선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
| 부제 | 이규태 산문집 |
| 글·그림 | 이규태 |
| 기획·편집 | 김미래 |
| 북디자인 | 정동규(텍스트프레스) |
| 출판사 | 쪽프레스 |
| 출간일 | 2026년 11월 5일 |
| 정가 | 30,000원 |
| 판형 | 136 × 225mm |
| 쪽수 | 232쪽 |
| 제본 | 노출사철제본 |
| ISBN | 979-11-89519-90-2 (03810) |
| 구성 | 글 59편, 그림 83장, 단편 3작품 |
| 예약판매 | 650부 — 텀블벅과 해외 주문 포함 |
책소개
‘가장’의 태도로 그리는 사람
“그는 내가 가진 친구 중 가장 고집이 세고, 가장 승부욕이 강하며, 가장 시간을 잘 지키고, 가장 집안일을 빈틈없이 하고, 가장 신소리를 잘하고, 가장 인도에 많이 가보았으며, 가장 어린애 같다. 그런데 ‘가장’ 뒤에 이어지는 진술보다 ‘가장’이라는 말이 그를 더 잘 설명한다. 그는 다소, 제법, 대충, 어느 정도 그러지 않고 늘 가장 그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그의 전시를 위해 쓴 글의 한 대목이다. 그림은 그중에서도 ‘가장’의 영역일 것이다. 그는 끌리는 것을 골라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담아낸 뒤, 한 장이 끝나면 곧장 새 종이를 꺼낸다. 이 책에는 그가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적응해 나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라씨 한 잔에 화를 낸 사람이 다음 날 사과하러 가고, 혼자 해내려던 사람이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 책을 붙잡아 주는 것은 잘 그리는 법이 아니라 그림을 계속 그리며 사는 방식이다. 책 곳곳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되풀이된다. 혼자 하려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익숙한 오른손을 내려놓고 왼손을 쓴다. 알고 있는 모양 대신 눈앞의 모양을 다시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바로 판단하다가 상대가 일하는 시간을 지켜본다. 그리고 미완성의 작업으로 돌아가 다시 선을 긋는다. 그는 그림으로 어느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기보다, 그리는 동안 자기 버릇을 알아차리고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해 보는 사람이다.
면을 선으로 옮기는 데에는 주저함이 따른다. 다만 그 주저함과 떨림이 반복되어 한 사람의 양식이 되고 업이 된다. 여든여덟 개의 한정된 건반에서 아득한 선율이 태어나듯, 그의 한계들이 이룬 선은 즐겁게 바라볼 만하다.
그런 그가 처음 적은 생각들
이규태의 그림에는 함께 걷고, 밥을 먹고, 공을 차고,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자주 나온다. 사람이 단 한 명만 놓인 그림들이 조금도 쓸쓸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보아 주고 있어서다. 결혼식에 맞추어 직접 펴낸 청첩장 같은 첫 작품집 『JAEIN』에서도 그의 아내는 수없이 뒷모습과 옆모습으로 혼자 걸었지만, 보이는 이와 보는 이는 구분되지 않았고 하나의 길은 늘 우리의 길이 되었다.
좋은 책은 결국 공책이 되어 주는 책이다. 어떤 책은 읽는 사람이 무언가를 쓰고 싶어 못 견디게 만든다. 이규태의 전시를 볼 때도 그렇다. 무엇이라도 끼적이고 그려 보고 싶어진다. 이 책 역시 몇 쪽을 읽다가 책을 덮고 주변을 둘러보거나, 종이 한 장을 꺼내 무언가 그려 보게 만든다.
차례
들어가며
1부 매일 조금씩 길어지는 애니메이션매일 조금씩 길어지는 애니메이션 · 정면에서 바라본 코 · 트로피 사진 · 도깨비방망이 · 다름 · 현과 모 · 김박사 · 고메엉아 · 과일 깎기 · 균형 · 런런런 · 외주잡이 배와 만화 · 극과 극 · 체질 · 기소불욕 물시어인
2부 펼친 책
3부 겹친 실루엣겹친 실루엣 · 면이 선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 언제 왔었나 싶게 · 정육면체와 새 · 나무와 아이 · 기울지 않은 것 · 온기
4부 건축가건축가 · 공포 · 파커 · 한여름 밤의 꿈 · 동그라미들 · 외출 · 비행성년 · 내가 그린 기닌 · 금문
5부 도로 삼킨 말
6부 새해의 정물화새해의 정물화 · 무릎 위의 딱지 · 약손 · 멀어짐 · 전하지 못한 말 · 가방 · 이사와 이상 · 디지털 디톡스 · 물린 자국 · 종아리 · 시에나 브라운 · 거리 · 남쪽 바다 · 그랜드
7부 처음은 돌뿐이었다
8부 도착
9부 눈으로 그리기눈으로 그리기 · 주변의 가까운 것 · 눈높이와 투시 · 실눈뜨기 · 복숭아의 크기 · 냉정해야 한다 · 저용량 메모리 장치 · 대비 · 컵과 문의 너비 · 입체와 평면 · 이상한 것 · 마감
나오며
책 속에서
우리는 「드래곤볼」 따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나는 피콜로를 잘 그렸고, 친구는 크리링을 잘 그렸다. 정면을 바라보는 피콜로의 코에는 입체적인 멋이 있었는데, 모호하게 얼버무리지 않고 표현한 데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 훗날 눈썹과 속눈썹이 자라는 방향과 눈물샘의 위치, 등근육과 뼈마디를 관찰하고 이해한 다음 표현하게 된 데는 피콜로의 정면 코 덕이 컸을 것이다.
알지 못해 얼버무린 것은 정면에서 바라본 코만이 아니었다. 수업시간 내내 그린 그림을 가장 먼저 볼 수 있게 상대의 책상에 펼쳐주던 우리는, 그날을 끝으로 서로의 노트를 보지 못한 채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 「정면에서 바라본 코」에서
몸보다 커다란 종이 위에 가로, 세로, 대각선 방향으로 긴 선을 긋는 연습을 했다. 삐뚤거리는 선들이 쌓여 온통 검게 변한 종이가 딱 김 같았다. 낯가림이 심해서 연필 깎을 칼을 놓고 온 날은 손톱으로 연필을 뜯었다. 행여나 들키면 누군가가 칼을 빌려줄까 봐 숨어서 뜯었고, 지우개를 놓고 온 날은 버려진 지우개를 찾아다녔다. (…) 흑연이 수북이 쌓이는 동안 좋은 선에는 힘과 속도의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 「김박사」에서
손바닥만 한 동그라미 안에 동전만 한 동그라미 두 개를 그리면 눈이 생긴다. 세로선을 힘 있게 꺾어주니 오뚝한 코가 그려지고, 부드러운 곡선에는 웃음이 담긴다. 나란히 걷는 두 마리 강아지, 나뭇가지와 나뭇잎, 빌딩과 하늘, 자동차와 도로는 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종이 위에서 선으로 해석되는 수많은 대상은 현실 속에서 입체로, 면으로 존재한다. 면이 선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생기는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 표제작 「면이 선이 된다는 사실만으로」에서
졸업작품은 베타테이프로 제출해야 했다. “테이프 어떻게 구워요?” 이 한마디면 장비실에서 밤을 꼬박 새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누군가에게 귀찮은 일이 될까 싶어 묻지 않았다. 모두가 떠난 장비실에서 밤은 깊어갔다. (…) 남의 곤란은 눈에 잘 들어오는데 정작 내 곤란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는 서툴렀다.
“밥 먹었어?” 늦은 귀가에 재인이 묻는다. “아니, 배고파.”
— 「기소불욕 물시어인」에서
단돈 1000원짜리 라씨. 그의 행동을 왜 웃음으로 감싸지 못했을까. 냄비에 세탁물을 받아온 파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고 못 사는 내 모습을 며칠 새 두 번이나 만난 것이다. 이튿날 라씨집을 또 찾았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남자는 말없이 종이컵에 라씨를 담는다. 이번에는 다히가 잔뜩 올라간다.
— 「처음은 돌뿐이었다」에서
“왼손으로 그려볼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성민과 재인의 눈이 동그래진다. “좋아.” 성민이 말하자 재인도 따라 말한다. 오른손잡이 셋이 약손에 붓을 든다. (…) 팔레트 위에서 투박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색을 섞는 왼손을 바라보니 웃음이 난다. (…) 순서와 요령을 고려한 구성 따위 약손에게는 없고, 원하는 방향으로 적당량 물감을 종이에 바른 것만으로 충분히 제 몫을 해준 것 같다.
— 「새해의 정물화」에서
낯선 왼손잡이 생활이 불편하지만은 않다. 익숙하던 손보다 느리지만 청소기를 돌리거나 양치질, 샴푸질을 미숙하게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효율의 기준이 사라지니 오히려 여유롭다.
— 「약손」에서
2013년에 결말부를 남기고 멈춘 124페이지 만화 「공 구르기 전」. 되고 싶은 동식물의 탈을 자유롭게 바꿔 쓰면서 세상을 구르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이야기다. 완성하지 못한 채 다른 작업으로 넘어간 건 용기가 없어서였다. 완성을 하게 되면 딱 그 자리에서 못 박아질까 겁이 났던 거다. 자신의 작업수준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이 세월과 함께 옅어지기를 기다렸다가, 2023년 겨울 24페이지의 콘티에 잉크를 더할 용기를 냈다.
— 「매일 조금씩 길어지는 애니메이션」에서
나의 문장은 속이 찬 것이면 좋겠고, 한 말을 또 하면서 읽는 사람을 붙잡지 않았으면 좋겠다. (…) 그린 듯 만 듯 그은 선에게 “괜찮아”라고 말하고 서둘러 새 선을 잇는다. 한숨에 종이를 채우고 나면 시간을 접어낸 기분이 든다. 그대로 끝내도 될까 싶은 흩날리는 선을 남기는 어느 날의 용기처럼, 이 책도 이렇게 남겨둔다.
— 「나오며」에서
만든 사람들의 말
편집 · 김미래
나는 편집하지 않는 편집자가 되고 싶은 것 같다. 이 책에는 짧은 글도 긴 글도 있고, 일기도 여행기도 픽션도 있다. 이런 책은 만드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천의 실루엣을 두루 겪어보게 한다. 어떤 사람의 세계는 글보다 말로, 그림으로 잘 전해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도 알지 않는가? 모든 ‘첫’에는 ‘못’의 미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가 처음 쓴 책이기에 도처에 싹틔운 여러 가지 ‘못’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사람과 친구가 되어간다.
디자인 · 정동규(텍스트프레스)
작가의 그림과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을 ‘스케치북 같은 단행본’의 물성으로 옮기고 싶었다.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중심인 책이라, 종이 위에서 선의 결이 그대로 살아나는 데 가장 공을 들였다. 본문에 쓴 80g/㎡의 미색 마카롱은 선과 색을 부드럽게 받아들인다. 여기에 형광을 섞어 인쇄해 색연필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180도로 펼쳐지는 노출사철제본은 그림이 펼침면 가운데에서 끊기지 않게 하고, 손의 수고를 덜어 그만큼의 시간을 눈에 돌려준다. 보통의 단행본보다 조금 더 낭창낭창하고 부드러운 표지를 넘기면서 시작하는 독서의 시간이, 작가의 그림 공책에 다소간 참여하는 경험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작가 소개
이규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과 개인 작업을 오가며 일해왔다. 그리고 아직도 그린다. 결혼식에 맞추어 첫 작품집 『JAEIN』을 펴냈고, 인도를 여섯 번 여행했다. 치즈고양이 호두와 함께 산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호두가 호두라는 이름을 얻은 데도, 마흔 살이 넘은 오얏나무와 식구가 된 데도. 홀로 뿌리를 넓혀가고 한 뼘이라도 멀리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한 그루의 오얏나무. 내가 떠올리는 내 이름의 이미지다. 엉망으로 뻗은 가지에도 새순이 돋아나고 잎이 자란다. 스스로가 가장 신기해서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열매들을 하나둘 모아 이 책에 싣는다.
면이 선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 이규태